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ChatGPT와 같은 생성 AI 도구를 글쓰기 교육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AI에게 시를 써달라고 요청한 후 이를 수정해보세요”, “AI에게 역사적 인물의 가상 일기를 작성하게 하고 이를 발전시켜보세요” 등의 수업 활동이 혁신적인 교육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초중등 학생들의 언어 발달과 창의적 사고 형성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언어 발달 저해
초중등 시기는 언어 능력이 급속도로 발달하는 결정적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학생들은 어휘력을 확장하고, 문장 구성 능력을 개발하며,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AI가 이 과정을 대신하게 되면 언어 발달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심각하게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5학년 학생이 ‘우리 동네의 미래’라는 주제로 글을 써야 할 때, AI에게 초안을 작성하게 하는 활동을 상상해 봅시다. 이 학생은 AI가 생성한 세련된 표현과 풍부한 어휘가 담긴 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학생이 자신의 현재 언어 수준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자연스러운 학습 과정을 생략하게 만듭니다. 학생은 자신이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 구조를 ‘편집’하게 되고, 이는 진정한 언어 발달이 아닌 피상적인 모방에 불과합니다.
창의적 사고 능력의 위축
글쓰기는 창의적 사고 과정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학생이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며, 독창적인 표현을 찾아가는 과정은 창의성 발달의 핵심입니다. AI가 이 창작의 첫 단계를 대신하면, 학생들은 ‘창조자’가 아닌 ‘편집자’의 역할로 축소됩니다.
구체적인 예로, 중학생들이 ‘미래 사회의 환경 문제 해결책’이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는 과제를 받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AI를 사용하지 않는 학생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관련 정보를 검색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구상하는 전체 과정을 경험합니다. 반면 AI에게 초안을 요청한 학생은 이미 구조화된 아이디어와 논리를 받게 되며, 자신의 독창적 사고 과정을 발전시킬 기회를 잃게 됩니다.
실제로 AI가 제시하는 환경 문제 해결책은 대개 기존 담론의 평균적이고 안전한 재조합에 불과합니다. 이런 내용을 기반으로 학생이 ‘편집’한다 해도, 진정으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사고 훈련이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학습 과정의 왜곡
글쓰기는 단순히 최종 결과물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학습 경험입니다. 특히 초중등 교육에서 글쓰기의 목적은 완벽한 결과물 생산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사고 과정을 발전시키고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AI를 활용한 창의적 글쓰기 수업을 다음과 같이 진행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AI에게 ‘봄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한 시를 써달라고 요청한 후, 이를 참고하여 여러분만의 시를 작성해보세요.” 얼핏 보면 이는 창의성을 자극하는 활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제시한 시는 이미 특정 이미지, 비유, 운율 구조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시적 상상력과 개인적 감성 표현 범위는 크게 제한됩니다.
진정한 창의적 글쓰기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경험, 감정, 관심사에서 출발하여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빈 페이지의 공포’와 씨름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글쓰기 교육의 핵심입니다. AI가 이 중요한 시작점을 대체한다면, 학생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귀중한 경험을 놓치게 됩니다.
자기효능감 발달 저해
글쓰기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는 경험은 학생들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 발달에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어려웠던 문장 구성이나 아이디어 표현이 연습을 통해 가능해질 때,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중학생이 자신의 첫 설득문을 작성할 때 겪는 어려움은 중요한 학습 과정의 일부입니다. 주장을 명확히 하고,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고, 반론을 예상하는 과정에서 학생은 비판적 사고 능력을 발전시킵니다. AI가 이 과정을 대신한다면, 학생은 표면적으로는 더 완성도 높은 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자신의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험과 그로부터 얻는 자기효능감의 발달 기회를 잃게 됩니다.
지식 구성 과정의 왜곡
글쓰기는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연결점을 발견하며,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합니다. 글쓰기는 지식 구성(knowledge construction)의 과정인 것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때, 여러 자료를 읽고, 정보를 선별하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단순한 글쓰기 훈련이 아닌 지식 구성의 과정입니다. AI가 이 과정을 대신한다면, 학생은 피상적으로 정보를 접하는 데 그치고, 깊은 이해와 지식 내재화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교사의 역할과 평가의 왜곡
AI 글쓰기 도구의 활용은 교사의 역할과 학생 평가 과정에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합니다. 전통적으로 교사는 학생의 글을 통해 사고 과정, 이해도, 표현 능력의 발달을 파악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제공해 왔습니다. 그러나 AI가 작성하거나 크게 영향을 미친 글은 학생의 실제 능력과 발달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중학교 국어 교사가 학생들의 논설문을 평가할 때, 문법적 정확성이나 논리적 구조 이외에도 학생 자신의 생각과 표현 방식의 발전을 중요하게 고려합니다. AI가 개입된 글쓰기에서는 이러한 개인적 발전 과정을 파악하기 어려워집니다. 결과적으로 교사는 학생의 진정한 능력이 아닌 AI의 능력을 평가하게 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균형 잡힌 접근법의 필요성
물론 AI 기술을 교육 현장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학생들은 AI를 포함한 다양한 기술적 도구를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AI를 언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적 판단입니다.
초중등 교육에서 AI 글쓰기 도구는 학생들의 자체적인 글쓰기 과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적인 역할로 한정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자신의 글을 완성한 후 교정이나 개선 제안을 받는 도구로 활용하거나, 다양한 글의 스타일을 학습하는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방식이 적절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사는 AI의 특성과 한계를 이해하고, 학생들에게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를 가르쳐야 합니다. 학생들이 AI가 제공하는 정보와 표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적절히 평가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초중등 교육에서 AI 글쓰기 도구의 무분별한 활용은 학생들의 언어 발달, 창의적 사고, 자기효능감, 지식 구성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교육자들은 단기적인 효율성이나 결과물의 표면적 완성도보다, 학생들의 장기적인 인지적, 정서적 발달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AI 시대의 글쓰기 교육은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중심에 두면서 기술을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균형 잡힌 접근법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교육의 목표는 AI에 의존하는 학생이 아니라, AI를 포함한 다양한 도구를 자신의 사고와 표현을 위해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사고자를 양성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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