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온 국민에게 감동을 준 따뜻한 미담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현대판 장발장 사건’입니다. 음식물을 훔치다 걸린 30대 아빠와 초등학생 아들에게 경찰은 국밥을 사주고, 슈퍼마켓 주인은 생필품 지원을 약속하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밥을 굶는 사람들이 있다니. 우리는 부채 의식을 가졌고, 선행에 가슴 뭉클했습니다.

모든 언론이 이 아름다운 모습을 받아 쓰면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취업과 생계 지원 제의가 잇따르고,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거론했습니다. 사각 지대의 복지 제도 개편에 불을 지폈습니다. 선행을 베푼 경찰관은 표창장을 받았고, 봉투를 건넨 해외 교포를 수소문해 감사장이 전달되었습니다.

결코 각박하지 않은 세상, 새로운 희망을 쏘아 올린 이 기사는 하지만 반전을 맞습니다. 이들 부자의 상황이 실제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인터넷에 떠돌더니 결국 ‘장발장’을 부정하는 후속 보도가 나왔습니다. 과거 직장에서 여러 건의 절도 전력이 있었다는 동료들의 증언이 있었고, 어렵기는 하지만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인이 실토했습니다.

감동은 허탈감으로 변했고, 경찰관이나 대통령은 민망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관련 기사 꼭지 수를늘리던 매체는 역풍을 맞았습니다.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99%가 가짜 연기라고 말한 지인의 말처럼 당사자의 책임뿐일까요? 가슴 뭉클한 뉴스를 처음 전한 지상파 TV와 이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다른 매체는 문제가 없었을까요?

이번 사건을 길게 설명한 것은 미디어와 수용자, SNS의 역학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미디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팩트체크입니다. 인터넷과 SNS, 유투브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무수한 정보와 주장이 난무합니다. 언뜻 봐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실 여부를 가리는 리트머스 같은 역할이 중요해졌습니다. 과거에 비해 영향력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 매체에 기대를 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장발장 사건’의 첫 보도가 의도적인 왜곡이나 과장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관계자의 얘기만을 들었을 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죠. 배고파 절박한 상황에서의 절도, 그리고 이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호의와 친절은 심금을 울리고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기사였습니다. 물론 단독 기사에 대한 기대도 있었겠죠. 아쉬운 것은 당사자의 말을 검증하는 팩트체크가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다른 매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흐름은 정보의 독과점 시대를 무너뜨렸지만 가짜의 유통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을 선호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습니다. 적대와 불신이 강해지고, 한쪽 눈을 감은 채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과 이념의 잣대로만 바라보는 확증편향이 깊어졌습니다.

콘텐츠에 대한 분별력, 미디어 리터러시는 팩트체크와 더불어 이제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검증은 취재 보도의 기본입니다. 사실을 알리는 언론의 의무죠. 그런데 이게 왜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팩트체크나 검증을 정치적이나 이념적으로 이해를 달리하는 민감한 기사에만 들이대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절박한 상황의 어려운 이웃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인간애의 그 겉모습만 보고 심층 접근을 시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런 내용은 누구도 팩트체크를 요구하지도 않죠.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요즘 언론을 보면서 든 또 다른 생각은 특정한 상황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심층 기사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SNS에 광고를 내주면서 조회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사실 공급자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기저에는 장문의 기사보다는 입맛에 맞는 짧은 글이나 가볍고 소프트한 뉴스에 매달리는 수용자의 습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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