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여 뽐내지 마라(Death be not proud)
존던(John Donne, 1572~1613)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어떤 사람들은 그대를
강하고 무섭다 말하지만, 그대는 그렇게 강하고 무섭지 않아.
그대가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가련한 죽음이여, 그대는 나도 죽이지 못해.
그대의 그림들에 불과한 휴식과 잠에서
많은 기쁨이 흘러나온다면,
그대에게선 더 많은 기쁨이 흘러나오리라.
(중략)
아편이나 마술도 우리를 잠들게 할 수 있으니,
그대의 습격보다 훨씬 좋지, 그런데 그대는 왜 그리 거만한가?
짧게 한잠 자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
더이상 죽음은 없으리, 죽음, 그대가 죽으리라.
<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를 쓴 보마르셰(Beaumarchais, 1732~1799)가 물었습니다. “사랑과 평화는 한 가슴 속에 공존할 수 있을까요?” “만약 공존할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과 평화중에 어느 것을 선택 하실 건가요? “
인간은 누구나 공통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욕심, 슬픔, 눈물, 비탄, 애도, 감동, 화, 분노, 교감 등을 가지고 사는데 이런 감정과 욕구등은 인도인들이나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 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이순신과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살았고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길가에 피어난 예쁜 꽃을 발견하면 인간은 누구나 한발짝 다가가 사진을 찍거나 고개를 숙여 잠시라도 쳐다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절실하게 매달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 권력, 명예, 가족, 인맥, 종교, 환경, 집, 자동차, 건강 등 일겁니다 그런데 한 발 더 들어가보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매달립니다. ‘사랑’과 ‘죽음’입니다. 사랑과 죽음은 구체적이지 않는 ‘모호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완전하지 않는, 이해되지 않는 결핍과 불투명으로 무장한 사랑과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결핍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갈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니 ‘갈망’입니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과 상상, 그것이 갈망의 다른 모양 아닐까요. 완전한 사랑, 완벽한 죽음,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인간은 결혼을 할 때, 완전한 사랑을 꿈꾸며 둘이 하나가 되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만, 사실 해보면 구체적인 사랑을 완성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건 완전한 사랑은 갈망 속에 있을 뿐이지, 현실 속에서 그것을 완성하고 구현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 1936년~)는 <탈무드>에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12가지를 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 돌-쇠-불-물-구름-바람-인간-공포-술-잠-죽음-사랑 입니다. 그는 사랑을 죽음보다 강하게 생각한거 같습니다. 맞을 겁니다. 사랑보다 위대하고 강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녹일 수 있고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보다 죽음이 더 강하다고 느껴집니다. 강하다는 표현은 사랑보다 죽음이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주도권을 인간이 쥐고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대상의 실체가 있고 교감할 수 있는 반면 죽음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고 예측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측이 안된다는 것은 때로 어떤 설렘과 감동을 줄 수 있으나 거의 대부분 두려움을 던져줍니다.
죽음, 삶의 유한성은 인간을 변하게 만듭니다. 악한 사람을 착하게 만들고, 분노하는 사람을 눈물 흘리게 만들며, 화내는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 그것만 인지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일상의 중심은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한 삶을 갈망합니다. (계속)
세상에 가장 강한 것… 죽음? 사랑?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