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학업 성적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하다. 국제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3년마다 조사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15세 이상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PISA)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79개국 가운데 최상위권이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한 이 조사에는 하지만 정반대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학업성취도만 보면 최고이지만 삶의 만족도는 세계 꼴찌 수준으로 나타난 것이다. 조사 대상 71개국 가운데 65위였다. 공부에 치여 힘들게 생활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학교는 학생들이 장차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가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시민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학업과 생활에서 보여지는 괴리감은 우리 교육이 풀어야할 숙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에 교육이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생겼다. 정보 만연의 시대에 필히 갖춰야 할 문해력, 디지털 리터러시다.

OECD는 2021년에 공개한 ‘21세기 디지털 세상에서의 리터러시 기술(21st-Century Readers DEVELOPING LITERACY SKILLS IN A DIGITAL WORLD)’ 보고서에서 “과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백과사전에서 정보를 찾게 하고 이것이 정확한 사실이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구글에서 수백만 개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어도 무엇이 옳고, 어떤 게 사실인지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국회도서관이 미국과 프랑스의 미디어 리터러시 입법 사례를 소개하면서 OECD의 이 자료를 인용했다. 한국의 청소년은 이메일 피싱을 식별하는 능력에서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권이었다. ‘주어진 문장에서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능력’을 조사하는 평가도 마찬가지다. OECD 국가 평균이 47%였는데 한국 학생들은 25%에 불과했다. 정보가 주관적이거나 편향적인지 식별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기술은 우리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줬다. 이제는 정보 그 자체보다 정보를 걸러내는 게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OECD는 21세기 리터러시는 우리가 온라인으로 무엇을 진행하기 전에 ‘멈춰서 좌우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게 사실인지, 출처가 어딘지, 누가 올렸는지,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나의 편견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총체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소셜 미디어를 지목한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생각이 같은 그룹과 연결해 똑 같은 목소리만 가득한 방에 가두는 ‘에코 챔버(echo chamber)’ 효과를 증폭시키게 된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반대의 주장을 차단한다. 결국 사회를 양극화시키고, 민주주의에 역행하게 된다. 소셜 미디어에 사용되는 기술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데 이런 사실을 대다수 이용자들은 잘 알지 못한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정보의 사실 여부나 모호성을 가려내고, 관점의 다양성을 익히고 수용하는 역량은 디지털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명제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시민이 갖춰야 할 기본기이고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토대이다.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아이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학업 성적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2016년 워싱턴주가 미디어 리터러시 등을 규정한 학교법을 최초로 통과시킨 이후 현재 14개 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법에 미디어와 정보 교육을 명시하고, 교육에 반드시 미디어와 정보 교육이 포함되도록 하고 있다. 정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교육도 여기에 들어있다.

한국은 일부 정부 산하기관과 민간 차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학교 교과 과정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미디어 리터러시나 미디어 교육이라는 용어도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국회에 관련 법안 3건이 발의되었지만 모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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